"KTX 문이 열리는 순간, 축축한 바람이 볼을 스쳤다. 강릉에 비가 온다."

비 오는 거리

강릉역, 비를 맞으며

두 시간 반을 달려왔다. 창밖으로 초록빛 산과 터널이 번갈아 지나가는 동안, 머릿속에는 푸른 바다와 커피 한 잔이 있었다. 그런데 강릉역 문이 열리자 쏟아진 건 햇살이 아니라 빗방울이었다.

플랫폼에 내린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누군가는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고, 누군가는 급히 가방에서 우산을 꺼낸다.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왔는데, 첫 인사가 빗소리라니.

기차역과 빗방울

그래도 사람들은 웃고 있다

역 앞에서 신기한 걸 봤다. 비를 맞으며 셀카를 찍는 커플. 우산 하나에 네 명이 몰려서 깔깔대는 친구들. 아이 손을 잡고 웅덩이를 첨벙첨벙 건너는 가족.

아무도 화를 내지 않았다.

일상에서라면 비는 짜증이다. 출근길을 망치고, 머리를 눅눅하게 하고, 신발을 적시는 귀찮은 존재. 그런데 여행지에서의 비는 어딘가 다르다. 불편한 건 똑같은데, 그걸 받아들이는 마음이 다르다.

여행이라서 괜찮은 게 아니라, 괜찮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여행이 되는 거다.

비가 주는 것들

생각해보면, 비 오는 강릉도 나쁘지 않다.

  • 관광지가 한산해서 줄 안 서도 된다
  • 카페 창가에 앉으면 빗줄기가 영화 같다
  • 바다 위로 내리는 비는 평생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 젖은 소나무 숲 냄새는 맑은 날에는 못 맡는 향이다
  • 우산 아래서 어깨를 부딪히며 걷는 것도 추억이 된다

완벽한 날씨만 기다렸다면, 우리는 영영 떠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바람이 불든, 떠나온 것 자체가 이미 절반의 성공이다.

빗속의 바다

젖은 거리를 걸으며

우산을 쓰고 강릉 시내를 걸었다. 비에 젖은 간판들이 반짝이고, 커피 볶는 냄새가 축축한 공기에 더 진하게 퍼졌다. 따뜻한 국물이 당겨서 들어간 작은 식당에서 순두부를 시켰다. 후후 불며 한 숟갈 떠먹는데, 창밖으로 빗줄기가 굵어졌다.

그 순간 생각했다. 이것도 꽤 괜찮은데.

인스타에 올릴 파란 하늘 사진은 없지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두부 사진이 있다. 해변에서 뛰는 영상은 없지만, 빗소리를 배경으로 찍은 15초짜리 릴스가 있다. 완벽하지 않아서 오히려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나에게 쓰는 메모

— 날씨는 내가 정하는 게 아니지만, 기분은 내가 정할 수 있다.
— 비 오는 여행도 여행이다. 아니, 더 특별한 여행이다.
— 옆 사람이 웃고 있으면, 비는 그냥 배경음악이 된다.
— 완벽한 조건을 기다리지 말자. 지금이 이미 충분하다.
— 강릉의 비, 나쁘지 않았다고 나중에 분명 말할 거다.

비 온 뒤 풍경

돌아가는 KTX 안에서 창밖을 보며 생각할 것이다. 비 때문에 못한 것들보다, 비 덕분에 한 것들이 더 많았다고.

그러니까 지금 강릉에 비가 와도, 괜찮다. 빗소리도 파도 소리도, 전부 여행의 일부니까.

— 비 오는 강릉 어딘가에서, 모퉁이.